동해와 태평양을 잇는 해협에 보석같은 어화(漁火)[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8일 14시 00분


일본 홋카이도 서남부 항구도시 하코다테(函館)는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두고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靑森)를 마주 보고 있다. 쓰가루 해협은 동해와 태평양을 잇는 좁은 통로의 바다. 일본 첫 개항장이던 하코다테에서 이국적인 야경을 감상하고,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아오모리 원시림 계곡에서 봄을 부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하코다테 야경.
● 일본 첫 개항장 하코다테 야경

오전 6시, 눈이 저절로 떠졌다. 알람을 맞춰 놓지는 않았지만 하코다테 명물인 아침시장(朝市)에 가 보겠다는 생각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창밖을 보니 눈보라가 심하게 치고 있다. 저 눈발을 뚫고 가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결론은 고(GO)! 언제 또 저런 홋카이도 눈발을 온몸으로 맞아 볼까나.

하코다테역 앞 설경.
하코다테 기차역 주변 아침시장 식당에서는 연어알과 생선회를 비롯한 해산물을 얹은 덮밥(카이센동)을 팔고, 시장에선 홋카이도 북방게와 연어, 굴을 팔고 있었다. 울릉도와 독도가 있는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 하코다테 특산물은 뭐니 뭐니 해도 오징어다. 주문진 항구 노천시장처럼 골목골목 이어지는 수산시장에서는 오징어를 얇게 채 썬 오징어 소면(이카 소멘)이 명물이다.

일본 첫 개항장이던 하코다테항 모토마치에 있는 서양식 성당.
하코다테는 1853년 흑선(黑船)을 몰고 도쿄만(灣)에 나타난 미국 페리 제독이 이듬해 막부 정부와 맺은 ‘미일 화친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외국에 문을 연 항구다. 당시 미국은 왕성하던 포경업(捕鯨業) 전진기지로 하코다테항을 요구했다. 이후 다른 나라에도 문호를 개방하면서 외국 선원들이 밀려들었다. 영국 러시아 영사관이 설치되고, 영국 성공회와 러시아 정교회 회당이 세워졌다. 인천 개항장 거리와 개화기 각국 공관이 몰려 있던 서울 정동길 ‘눈 내리는 교회당’ 분위기와도 비슷하다.

하코다테항 핫플레이스 쇼핑몰로 변신한, 붉은 벽돌 아카렌카 창고군.


하코다테항에는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카네모리 아카렌가 창고군(倉庫群)’이 도열해 있다. 하코다테가 교역항으로 전성기이던 시절 세워진 창고다. 검푸른 바닷물과 붉은 벽돌, 흰 눈과 화려한 네온이 어우러진 창고는 지역 특산품을 파는 쇼핑몰로 변신했다.

하코다테 모토마치 러시아 정교회 소속 하리스토스 정교회 회당.
항구에서 하코다테산(해발 334m) 방향으로 하치만자카(八幡坂) 언덕을 오르다 보면 서양풍 건물이 가득하다. 옛 하코다테 공회당과 옛 영국 영사관과 성공회 회당, 러시아 정교회 소속 하리스토스 정교회 회당, 프랑스 가톨릭 성당인 모토마치 성당 등이 이국적이다.

세계 3대 야경 또는 일본 3대 야경’로 꼽히는 하코다테 야경.
이번에는 케이블카인 로프웨이를 타고 하코다테산을 올라 ‘일본 3대 야경’으로 불리는 하코다테 야경을 보러 갈 차례다. 케이블카를 타면 바다가 보이는 쪽 창문에 바짝 붙어야 한다. 점점 올라갈 때마다 보석처럼 화려한 야경이 펼쳐친다. 항구 불빛뿐 아니라 바다 위를 휘황찬란하게 수놓는 오징어잡이배 어화(漁火)까지 한몫한다.

유럽 성곽도시 축성법을 따라 지은 별 모양 오각형 요새 고료카쿠.
일본과 외세가 최초로 부딪친 경계 지점인 하코다테는 막부 정권 구세력과 메이지 정부 신세력이 맞붙은 치열한 내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무대는 별 모양 오각형 요새 고료카쿠(五稜郭). 사무라이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하코다테 전쟁 유적지다.

1864년에 준공된 서양식 보루(성곽)인 고료카쿠는 면적이 도쿄돔 약 5배에 이르는 규모다. 성곽 맞은편 고료카쿠타워에 오르면 해자가 깊게 파여 있는 별 모양 요새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료가쿠 타워.
고료카쿠는 에도(도쿠가와) 막부가 당시 관청으로 사용하던 하코다테 부교쇼(奉行所) 방비를 목적으로 만든 성이다. 하코다테가 개항하고 3년 후인 1857년 착공했다. 별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방어군의 사각(死角)을 줄일 수 있는 유럽 성곽도시 축성법을 연구해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 최대 서양식 보루 고료가쿠는 1868년 말부터 도쿠가와 막부 탈주병과 메이지 정부군 사이에 벌어진 하코다테 전쟁의 무대가 된다. 구세력 반(反)정부군은 메이지 신정부에 맞서 ‘에조(蝦夷) 공화국’ 건국을 선언하면서까지 맞섰지만 결국 7개월 만에 진압된다.

흥미로운 것은 도쿠가와 막부에 고용됐던 프랑스군 군사 교관 줄 브뤼네 대위와 그의 부하 4명이 반정부군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3)에 등장하는 전(前) 미군 대위 네이든 알그렌(톰 크루즈 분)은 브뤼네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이들은 최후까지 막부를 위해 분전한 마지막 사무라이로 소설과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초밥과 사케가 나오는 일본항공(JAL) 비즈니스석 기내식.
하코다테는 김포공항에서 오전 7시50분 출발하는 일본항공(JAL)을 타고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국내선으로 환승하면 오후 2시경 도착한다. 쓰가루해협을 마주 보고 있는 아오모리로 가기 위해서는 신칸센 하야부사를 타고 세이칸(靑函) 해저터널(총연장 53.85km)을 건너야 한다. 기차역에서 파는 에키벤(駅弁) 도시락을 먹다 보니 1시간여 만에 해저터널을 지나 아오모리에 도착했다.

● 아오모리 원시림 빙폭(氷瀑) 투어

아오모리역 주변 현수교.


아오모리현 남부에 있는 도와다하치만타이(十和田八幡平)국립공원에 들어서면 아오모리의 뜻이 왜 ‘푸른 숲’인지 실감하게 된다.

아오모리 호시노리조트에서 바라본 오이라세 계류.

아오모리 호시노리조트에서 바라본 오이라세 계류.


해발 400m 도와다산 정상 칼데라호수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길이 약 14km인 오이라세(奧入瀨) 계류(溪流·계곡물)를 타고 흘러간다. 오이라세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여울이 많아진다’는 뜻다. 그 말대로 오이라세 계류는 상류로 올라갈수록 급류가 되어 많은 폭포를 만들어낸다.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류 빙폭(얼음폭포) 투어.


도와다하치만국립공원 청정 원시림에 자리 잡은 호시노 리조트에서 계류의 물소리에 잠을 깼다. 이 호텔은 벽면 곳곳이 이끼와 빙폭(氷瀑·얼음폭포)으로 장식돼 있다.

벽면이 이끼로 장식된 호시노리조트.


복도 벽면 내부에는 물을 주는 장치가 있어 습기에 민감한 이끼가 잘 자란다. 또한 흰 눈이 쌓인 계류를 바라보는 노천온천 주변에는 얼음폭포가 장관을 이룬다.

얼음폭포로 장식된 호시노리조트 오이라세 계류 노천 온천.

오이라세 계류는 가을 단풍으로 손꼽히는 명소지만 겨울에는 얼음폭포를 탐험하는 트레킹도 인기다. 리조트에는 소형버스를 타고 계류 빙폭을 구경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버스는 계류에 있는 14개 폭포마다 잠시 정차해 해설사가 설명을 해주고, 가끔씩 승객들이 폭포 아래까지 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준다.

아오모리현과 아키타현에 걸쳐 있는 칼데라호수 도와다호.


가도 가도 끝없던 계류가 갑자기 끝나고 시야가 툭 터진다. 아오모리현과 아키타현에 걸쳐 있는 바다 같은 호수 ‘도와다(十和田)호’다. 호수가 댐 역할을 하고 있어서 오이라세 계류는 1년 내내 흐르는 물의 양이 일정하다고 한다. 계류가 범람하지 않는 덕분에 바위에 무성하게 자라는 이끼를 보러 오는 여행객들 발걸음이 이어진다.

오이라세 계류의 얼음폭포를 야간에 둘러보는 ‘빙폭 라이트 업 투어’.
오이라세 계류의 얼음폭포를 야간에 둘러보는 ‘빙폭 라이트 업 투어’.


오이라세 계류에서는 태풍이나 폭설에 나무가 쓰러져 계곡을 덮쳐도, 쓰러진 나무를 치우지 않는다고 한다. 쓰러진 나무는 자연스럽게 작은 짐승들이 넘어 다니는 다리가 되고, 그 나무에서는 또다시 이끼가 자라난다. 겨울철 야간에 폭포를 탐험하는 ‘빙폭 라이트 업 투어’도 국립공원이라 전기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어 대형 LED등(燈)을 실은 이동식 조명차가 따라다닌다.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얼음폭포를 감상하는 아이디어인 셈이다.

아오모리현 핫코다산 정상의 나무들에 눈과 얼음이 얼어붙어 만들어진 수빙(스노우 몬스터).


아오모리 설경은 일본 100대 명산으로 꼽힌 핫코다(八甲田)산(해발 1580m)에서도 볼 수 있다. 길이 2.4km 핫코다 로프웨이에 몸을 실으면 10분 만에 정상에 오른다. 이곳 최고 명물은 스노우 몬스터로 불리는 수빙(樹氷)이다. 도도마츠(분비나무)에 얼음과 눈이 붙어 마치 춤추다 얼어붙은 것 같은 익살스런 괴물이 수백 개 서 있다. 높이 4~5m나 되는 자연이 만들어 낸 예술작품인 아오모리 수빙의 절정은 3월 중순까지다. 스키를 타고 수빙 사이로 지나가는 스키장 자연설(雪)은 4월 말까지 즐길 수 있다.

아오모리현 핫코다산 명물 ‘수빙(스노우 몬스터)’.
아오모리현 핫코다산 명물 ‘수빙(스노우 몬스터)’.
8월 초 열리는 아오모리 축제인 ‘네부타 마츠리’는 매년 약 300만 명이 찾는 대표적인 지역 축제. 그 해 가장 잘 만든 것으로 뽑힌 전통 등불수레는 아오모리역 근처 ‘네부타의 집 와랏세(WARASSE)’에 상설 전시된다. 미사와에 있는 ‘호시노 리조트 아오모리야’에서는 네부타 마츠리를 테마로 한 노천 온천이 있고 관련 공연도 펼쳐진다.

일본 아오모리현을 대표하는 축제 ‘네부타 마츠리’를 재현한 공연.
아오모리현 도와다시에 있는 도와다현대미술관은 연간 100만 명 넘는 방문객이 찾는다. 세계적인 조각가이자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의 호박 조형물 놀이터를 비롯해 비틀스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코의 ‘평화의 종’, 아오모리 출신 세계적 팝아트 작가 나라 요시토모(奈良美智)의 ‘요로시쿠 소녀’ 등이 전시돼 있다.

아오모리현 도와다현대미술관 앞 어린이 놀이터로 조성된 구사마 야요이의호박 작품.
아오모리현 도와다현대미술관 벽면에 전시된 나라 요시모토의 작품.
아르헨티나 출신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건축물-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전면에 비스듬한 거울을 설치해, 작품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 외벽에 매달린 것 같은 재미있는 모습이 연출된다. 한국인 조각가 최정화의 ‘꽃말(Flower Horse)’과 서도호의 ‘인과(Cause and Effect)’도 만날 수 있다.

아오모리현 도와다현대미술관에 전시된 레안드로 에를리치 작품 ‘건축물-부에노스아이레스’.


#일본 홋카이도#하코다테#아오모리#아트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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