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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일에 공감하고, 배려하다 지치는 일이 반복된다면 ‘공감 피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게티이미지
윤민지 씨(가명·29)는 친구들 사이에서 ‘태평양 오지랖’으로 통한다. 남 이야기를 자기 일처럼 들어주고 도와주는 ‘공감 왕’이라서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회사 동기의 전화를 끊기 어려워 밤새 들어주다 다음 날 지각한 적도 있다. 다른 사람 일 도와주느라 정작 자기 일을 끝내지 못해 야근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 아무리 바쁘고 피곤해도 누군가 도와 달라고 하면 거절하기 어렵다. 윤 씨는 “가족들은 ‘그러다 네가 골병든다’고 타박하지만, 차라리 내가 피곤한 게 마음 편하다”고 말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도 문제지만, 과하게 넘쳐흐르면 오히려 ‘공감 피로’ 또는 ‘공감 스트레스’를 겪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남에게 공감해 주다 지친 상태를 말한다. 공감 피로라는 말은 원래 환자를 돌보면서 정서적 소진을 겪는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처음 사용됐다. 남들보다 ‘공감의 촉’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직업과 관계없이 누구나 공감 피로를 겪을 수 있다.
1일자 기사 ‘공감 능력 제로 탈출법’에서 연습을 통해 부족한 공감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아봤다면, 이번에는 직장이나 가정에서 공감이 흘러넘쳐 피곤해지는 이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 ‘공감 능력자’, 좋기만 할까?
다른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공감적 과(過)각성 상태에 있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 덕분에 주변에서 ‘착하다’는 말은 많이 들을지 몰라도, 정작 본인은 쉽게 방전될 수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의대 임상 조교수이자 작가인 주디스 올로프 박사는 공감 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의 감정적 경계가 흐린 사람을 ‘초민감자(empath)’라고 지칭했다. ‘공감 능력자’라고도 바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감 능력자’들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상대의 감정을 누구보다 고스란히 느끼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누구보다 괴로워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이들은 △다른 사람 기분을 잘 알아채고 △남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 감정을 내 감정인 양 느끼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라 자신은 소홀히 하는 특징을 가졌다. 감정 전이(轉移)에 민감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 스트레스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남들보다 더 큰 영향을 받아 쉽게 지친다. 감각적으로도 민감한 경우가 많아 소음 등 주변 환경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사람들은 공감 피로를 느끼기 쉽다. 공감할 때 필요한 인지적, 감정적 에너지를 과하게 사용하다가 금세 바닥이 날 수 있어서다. 게다가 상대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생각을 억압하게 되는데, 이때 몸은 이 과정을 스트레스로 인식한다. 결과적으로 스트레스로 인한 염증 반응까지 나타난다.
● 공감 잘하는 부모, 몸에 염증 더 많다
그 대상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에리카 만자크 미 노스웨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공감적인 부모는 그렇지 않은 부모보다 염증 수치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와 그들의 청소년(13~16세) 자녀를 247명씩 모집해 이들의 공감 능력, 염증 수치, 스트레스, 우울 지수, 인생의 목적, 자존감 등을 검사한 결과다. 자녀에게 잘 공감하는 부모는 자녀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수시로 억압하기 때문에 몸은 스트레스를 겪는다.
자녀에게 공감적인 부모들은 그렇지 않은 부모들보다 몸에 스트레스성 염증 수치가 더 높다. 동아일보 DB 같은 연구진의 또 다른 연구에서는 우울증을 앓는 자녀를 둔 공감적인 부모는 1년 뒤 몸에서 더 많은 염증 성분이 발견됐다. 우울하고 힘든 자녀 마음에 공감했을 뿐인데 그 대가가 따른 것이다. 부모와는 반대로 공감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청소년은 감정 조절을 잘할 뿐만 아니라, 몸의 염증 수치도 낮았다. 부모가 감정에 잘 공감해주기에 정서적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덕분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공감적인 부모는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자존감, 인생의 목적의식 등은 남들보다 높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자녀의 필요를 잘 채워 주는 좋은 부모라는 느낌이 부모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줄지라도, 몸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 공감 피로 쌓이면 타인에게 무관심해져
공감 피로가 누적되면 무관심으로 이어진다. 감정적 소진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의 소진을 막기 위해 무관심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TV에서 안타까운 사정이 있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부하라는 광고가 반복적으로 나올 때 나도 모르게 채널을 돌려버린 적이 있다면, 그 순간 공감 피로가 누적돼 회피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재신, 이민영 중앙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대학생 212명을 네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 그룹에는 울거나 화내는 인물 사진을 보여주며 이들의 감정에 최대한 공감해 보라는 미션을 줬다. 나머지 세 그룹에는 대조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웃는 인물에 공감하기(두 번째 그룹) 울거나 화내는 인물의 성별과 나이 관찰하기(두 번째 그룹) 웃는 인물의 나이와 성별 관찰하기(네 번째 그룹) 미션을 각각 부여했다. 첫 번째 그룹만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하느라 애쓰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게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
연구에 사용된 기아 구제 포스터. 학술지 ‘미디어 경제와 문화’ 그런 다음 각 그룹에 ‘식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소액이라도 기부해 주세요’라는 문구가 담긴 아프리카 기아 구제 포스터를 보여 주며 기부 의사를 물었다. 결과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공감해 보라고 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기부 의사가 유독 낮게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힘든 감정에 애써 공감하려고 노력하면서 공감 피로도가 높아지자,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 탓이다. 이재신 교수는 “공감 피로도가 높아질수록 무감각해지고 냉담해지는 경향성이 나타났다”며 “감정적 피로가 누적되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더 이상 내밀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은 안 좋은 소식이 범람하는 뉴스를 볼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각종 사건·사고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때면 뉴스를 보다가도 어느 순간 ‘지찬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스탠리 코언 런던정경대학(LSE)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저서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에서 이와 같은 공감 피로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사회 전체가 너무 언짢고 위협적이고 비정상적이어서 우리는 완전히 소화할 수 없거나 공개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정보를 제공받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안타까움,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모른척하고 도망치게 된다. 나를 방어하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 의사들은 환자에게 왜 무덤덤할까
평소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남을 돕는 직업에 매력을 느껴 의료진, 심리치료사, 사회복지사, 교사, 성직자, 자원봉사자, 비영리단체 종사자 등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런 직업을 가졌을 때 만나게 되는 환자나 고객의 부정적 감정에 지나치게 물들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감 피로로 인한 만성 스트레스는 번아웃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파발로로대 연구진이 의사 7584명을 연구한 결과 공감 피로를 느끼는 의사들은 주관적 고통 수준이 높고, 정서적으로 무감각하며 삭막한 상태에 이르는 경향이 발견됐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피로를 더 많이 느꼈고,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도 못했다. 성폭력 상담원을 대상으로 한 국내 연구 결과에서도 피해자를 상담하면서 느끼는 공감 피로로 인해 정서적 탈진과 무감각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올로프 박사(UCLA)는 ‘순교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기분에 지나친 책임감을 느끼며 자책하지 말라는 것이다. 순교자가 되지 않으려면 상대의 고통을 전부 내 것으로 끌어안지 말고 거리를 둬야 한다.
상대의 고통을 오롯이 함께 느끼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동아일보 DB경험 많은 의사들은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볼 때 일부러 공감 스위치를 끄는 훈련이 돼 있다. 대만 국립 양밍대 의대 연구진은 바늘로 몸을 찌르는 사진을 볼 때 의사와 일반인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뇌전도(EEG) 검사를 통해 살펴봤다. 그 결과 일반인은 사진을 보면서 자기가 바늘에 찔릴 때처럼 고통을 느끼는 뇌 부위가 반응했다.
의사들에게서 이런 반응은 나타나지 않았다. 공감 못하는 의사가 과연 바람직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의사들이 주사기나 메스를 들 때마다 마치 내가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면 그 또한 문제일 것이다. 대신 의사들은 자기 조절이나, 주의와 집중이 필요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반응했다. 연구진은 “의사들은 공감을 의도적으로 줄여 환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대신 이들을 어떻게 치료할지 인지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내 욕구 먼저 생각하기
공감 능력이 과하면 대인관계에서도 피로해지기 쉽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중심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의 공감 능력을 악용한다(지난 기사 참고: 이상한 성격 ‘톱3’에 드는 이 사람…어떻게 대해야 할까?). 공감 능력이 과한 사람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만족시켜주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나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양이 되기 쉬운 사람을 에코이스트(echoist)라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에게 저주를 받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만 메아리처럼 따라하게 된 에코라는 인물에서 따왔다. 나르시시스트가 다른 사람의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면, 에코이스트는 자기 욕구를 무시하며 산다. 자신감이 부족해 자기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남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특징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을 넘어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 감정을 살피고 신경 쓴다면, 스스로를 너무 부족하게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약한 존재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타인의 상태를 더 살피고 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자녀 일에 과잉 공감하며 일희일비하기 쉬운 부모라면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필요하다. 잠시 방문을 닫고 혼자 5분 휴식을 취하는 것부터 낮잠, 여행 등 뭐든 좋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무감각과 냉담함, 번아웃을 물리칠 수 있다. 이 교수는 “공감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과하거나 편향될 때 나타나는 공감의 양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댓글 2
추천 많은 댓글
2025-03-09 04:32:15
우리의 좋은 덕목을 서구화된 잣대로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냥 천성대로 살면 됩니다. 도덕적 사회적으로 특별한 문제없다면 그냥 자기 자신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2025-03-09 14:21:17
공감능력이 너무 좋으면 결국은 사람관계를 피하게 됨. 본인이 너무 힘듬을 알아 차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