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 1135년 1월 4일 묘청의 난… 시기를 놓치면 일이 커진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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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혜 작성일25-01-01 23:30 조회1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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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은 고려시대 서경(西京·현 평양)의 승려였다. 승려로 풍수지리에 밝았는데, 자신의 희한한 술법을 선보이며 어린 왕 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같은 서경 출신인 정지상도 묘청을 굳게 믿어 그의 오른팔로 활약했다. 전라도 출신의 문공인도 묘청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묘청은 서경이 큰 꽃의 형세를 가졌기 때문에 개경(현 개성)에서 이곳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항복하고 36개국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에 홀랑 넘어간 인종은 대화궁을 짓도록 허락했다. 묘청 일당은 인종에게 스스로 황제라 선포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것을 청했는데, 인종도 이 말에는 따르지 않았다. 고려가 칭제건원을 하면 송이나 금이나 가만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종이 서경에 있을 때 큰 화재가 일어난 일이 있는데, 묘청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서경에 오면 태평성대가 올 것이라더니 왜 불이 났느냐고 따졌다. 묘청은 “주상이 개경에 있었으면 더 큰 화재가 일어났을 것인데 서경에 계셔서 이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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